지난 한 주는 회식이다, 무슨 모임이다, 온갖 이유로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. 게다가 만취해서 기억을 잃은 날도 여러번. 나처럼 잡생각이 많은 녀석에게는 항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환경이 나쁠 건 없지만, 그러다보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짧아지는 단점이 있다.
그래서 오늘은, 전날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8시에 바득바득 일어났다. 학교도 회사도 마찬가지인 게,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시간을 날려보내기 마련이니까. 뭔가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달까.
집을 나서면서도 어디로 갈 지 정해두지 않았다. 조금은 유치할 지 몰라도, 아무 버스에나 올라탈 작정이었다. 다행히, 신촌가는 버스가 왔기에 망정이지, 이름만 들어도 암울해지는 부평행 버스가 왔다면, 솔직히 타진 않았겠지만 말이다.
트위터를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막 신촌역을 지나고 있었다. 이대역에 내려 뒤따라오는 파란 버스에 올랐더니, 어라 광화문을 가는구나. 결국 새로운 곳은 개뿔, 퓨어아레나에 들어가 놀았다. 이 곳의 가장 큰 장점은 혼자 와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1인용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다는 것인데, 거기에 틀어박혀 아점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, 이에 전혀 걸맞지 않는 시험 공부를 했다. 애처로운 신입사원의 현실이여.
오후 네 시가 되자, 주변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. 동네 아줌마들이 애새끼들 죄다 데리고 와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이건 그냥 답이 없다. 퓨어아레나의 실질적인 영업시간은 오전부터 오후 두 시까지다. 그 이후에는 퓨어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.
지겹기도 하고, 시끄럽기도 해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곤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. 바람은 서늘하고 햇볕은 땃땃한 게, 걷다보니 어느새 덕수궁 앞이었고, 조금 더 걷다보니 2주 후에 출근할 대한항공 서소문 지점이 보였다. 얼마나 수많은 아침을 헐레벌떡 뛰어갈까 잠시 상상해보곤, 예술의 전당에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.
사실, 오늘의 메인은 훈데르트바서 전시회였는데, 카페에 틀어박혀 있다보니 귀찮아져서 안 갈 생각이었던 것을 충동적으로 결국엔 가게 됐다.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줏어들은 건 많았지만, 부담스러운 색감에 그닥 기대를 하지 않았다. 특히 이 분은 나선과 보색에 대한 집착 비슷한 것을 갖고 있어서 많은 작품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하고, 그림도 그렸다가 건축도 했다가 시계도 만들었다가 우표 디자인까지, 아주 그냥 오지랖이 쩌시는 분이라 퀄러티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. 하지만 결론은?
저는 오늘부터 당신의 퓨어빠돌이가 되겠습니다.
지난달에 샤갈전을 봤을 때엔 약간 동화 같은 분위기가 좋아 두 번을 더 갔더랬는데, 훈데르트바서는 매일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. 앞으로 열흘 남은 전시 기간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. 특히, 실크스크린 작품 라인은 하나하나 눈을 뗄 수가 없다. 특히, "함께 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아프다." 라는 작품이 가장 좋았다. 색채의 마술사라는 샤갈이 어린 아이로 느껴질 만큼, 내가 느낀 간극은 너무나 컸다. 오죽하면 오디오가이드를 무한 반복하고, 북마크까지 사서 고이 모셔왔겠는가. 인터넷으로는 그 감동을 느낄 수 없어. 이건 가서 봐야 해.
돌아오는 길에, 나를 애타게 찾는 동기 녀석과 소주 한 잔을 하고 들어오니 그 감동이 다시 밀려온다. 그나저나 왜 나는 어느 조직에 가든 남자 녀석들에게 많은 이쁨을 받는가. 그 답을 찾기도 전에, 벌써 빈 맥주캔이 책상위에 수북하다.
아, 충만한 토요일이었다.



